김진한 변호사는 국회에서 대통령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이번 탄핵심판은 나라를 구하는 재판이 되겠다.’ 그 마음으로 국회 대리인단에 합류했다. 탄핵심판에 뛰어든 다른 변호사 16명(김이수·송두환·이광범 공동대표, 권영빈·김남준·김선휴·김정민·김현권·박혁·서상범·성관정·이금규·이원재·장순욱·전형호·황영민 변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윤석열 탄핵심판은 지난해 12월14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이후, 두 차례의 변론준비기일을 거쳐 1월14일부터 시작됐다(오른쪽 〈그림〉 참조). 11차례 변론이 진행되는 동안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한덕수 국무총리 등 증인 16명이 출석했다. 국회 대리인단은 크게 ‘본안팀’과 ‘증거조사팀’으로 나누어 변론을 준비했다. 탄핵심판에서 쟁점별 위헌성을 밝힌 본안팀은 김진한 변호사가, 증인신문 등 증거조사와 사실인정을 담당한 증거조사팀은 장순욱 변호사가 이끌었다.
4월4일 오전 11시22분 대통령 윤석열은 파면됐다. 재판관 8인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윤석열에 대한 탄핵을 인용했다. 국회 대리인단의 주장 대부분이 ‘2024헌나8 대통령 윤석열 탄핵 사건’ 결정문에 담겼다(18~23쪽 기사 참조). 파면 결정을 받아들기까지 국회 대리인단은 무엇에 주목했을까. 국회 대리인단 실무 총괄을 맡은 김진한 변호사를 탄핵 선고 하루 전인 4월3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4월4일 탄핵이 인용된 직후, 전화로 선고 결과에 대한 입장을 추가로 물었다.
윤석열에 대한 탄핵이 인용됐다.
우리가 주장한 내용이 결정문에 거의 다 담겼다. 재판관들이 헌법을 지키는 감사한 판결을 내려주었다. 다만 왜 이렇게 선고가 늦어져 국민을 위기 속에서 불안하게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탄핵 선고가 왜 늦어졌다고 보나.
증거법칙에 대한 보충의견이 있어서(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전문증거(진술을 기재한 서류)는 증거능력이 없다는 형사소송법상 전문법칙에 대해, 김형두·이미선 재판관은 탄핵심판 절차에서 완화하여 적용할 수 있다는 보충의견을, 김복형·조한창 재판관은 탄핵심판 절차에서 보다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보충의견을 냈다), 그 부분을 설득하느라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런데 결국 모두 결론에 동의했기 때문에, 그 보충의견만으로 추론이 가능하지 않다. 전원일치 결정이 나온 만큼, 전원일치를 만들기 위해 시간이 오래 걸렸구나 하는 건 추측할 수 있다.
탄핵 인용을 확신했나.
법적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용이 명백했다. 그런데 ‘권력의 힘’이 심판 절차 내내 느껴졌다. 대통령이 심판정에 등장한 3차 변론 때(1월21일)부터 사회적 분위기와 대통령 지지 세력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수사기관에서 다 자백했던 증인 몇몇은, 대통령이 심판정에 나와서 지켜보자 거짓말을 하거나 본인이 한 말을 뒤집고 자신의 행위가 떳떳한 것처럼 주장했다. 또 변론 종결 뒤 선고가 나오지 않는 동안, 권력의 힘 앞에 법과 논리가 위태롭게 느껴졌다. 권력의 힘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 ‘민주공화국을 지키는 소송’에서 질 수 있겠다는 두려움 때문에, 확신보다 걱정했던 순간이 더 많았다.
어떤 변론 전략을 구상했나.
이 사건은 사실관계도, 헌법 위반도 명백했다.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이 직무 정지된 상태였다. 신속하게 사건을 해결하자는 게 큰 전략이었고, 그래서 바로 본안에 집중해서 쟁점을 파악하고 전체적인 줄기를 만들었다. 우리가 전체적인 줄기를 잡고 있어야, 그 상태에서 증거조사도 하고 재판부의 요구와 상대방의 엉뚱한 주장에도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내란죄 철회’도 신속한 사건 해결을 위해서였나.
(윤석열의) 내란 행위에 대해 헌법적으로 평가받되, 내란죄는 평가받지 않겠다고 했다. 지금도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내란죄가 계속 탄핵심판 대상에 포함돼 있었다면, 상대방은 적법절차 원칙을 주장하면서 수사기록을 사용하는 데 대해 훨씬 더 심하게 저항했을 거다(윤석열 측은 형사소송법상 전문법칙에 따라, 검찰 조서를 탄핵심판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재판이 훨씬 지연됐을 거다.
윤석열 측은 “내란죄를 철회한 건, 소추 사유의 중대한 변경이므로 국회의 새로운 의결을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내란죄를 뺐으니 탄핵심판 청구 자체가 부적법하다, 다시 의결을 해야 한다’는 건 거짓 주장이다. 우리가 사실에 관해 철회하면 재판부도 구속되지만, (내란죄에 대한 법률적 평가를 받지 않겠다는 등) 법에 관한 주장은 우리가 아무리 ‘철회’한다고 해도, 판단은 헌법재판소가 한다. 그래서 이건 어떤 경우에도 부적법 사유가 될 수 없다(헌법재판소는 이 부분에 대해 “기본적 사실관계는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적용 법조문을 철회·변경하는 것은 소추 사유의 철회·변경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특별한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허용된다”라고 판단했다).
이번 탄핵심판 쟁점은 다섯 가지(비상계엄 선포, 포고령 1호 발표 지시, 국회 활동 방해 행위, 선관위 장악 시도, 법관 체포 지시)였다.
처음에 우리가 구성한 다섯 가지 쟁점이 ‘비상계엄 선포, 포고령 위헌성, 국회 침탈 행위, 선관위 침입 행위, 정치인과 법관 체포’였다. 그렇게 1차 변론준비 절차에 들어갔는데 재판부도 거의 똑같이 쟁점을 잡아왔다. 변론준비 과정에서, 정치인 체포를 국회 침탈 부분에 포함시키고 법관 체포 명령만 따로 쟁점으로 잡아서 최종적으로 다섯 가지 쟁점이 정해졌다.
무엇이 핵심 쟁점이었나?
하나하나 다 대통령을 탄핵시킬 만큼 중대한 헌법 위반 행위지만, 핵심은 당연히 비상계엄 선포 행위다. 비상계엄 선포는 헌법이 정한 요건과 절차에 따라 잠시 독재정치를 하는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독재정치는 허용되어선 안 된다. 다만 비상계엄이라는 특수한 제도를 만든 건 전쟁 등 모두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독재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때(를 상정한 거)다.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한 건, 대통령의 권한이 아니라 대통령이 민주공화국을 죽이는 행위다. 그것보다 더 중대한 헌법 위반은 없다. 또 하나 중요한 쟁점은 국회 침탈 행위다. 비상계엄 선포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군인을 동원해 계엄 해제 요구 의결이라는 통제장치도 망가뜨리려고 했다.
증인 16명 중 10명이 ‘국회 활동 방해(국회 봉쇄, 계엄 해제 의결 방해, 주요 정치인 체포 시도)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국민들이 생중계로 국회 침탈을 다 지켜봤는데, 이게 왜 문제가 되나’ 싶을 수 있다. 모두 그 행위를 본 건 사실이지만 대통령이 (국회 활동 방해를) 지시했다는 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사실인정 다툼이 있었다. 대통령이 국회에 가서 국회의원을 끌어내라고 지시했고, 그 지시의 궁극적인 목적이 비상계엄 해제 요구 의결을 막는 것이라는 걸 입증하지 못하면 이 부분(국회 활동 방해)이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부분 입증이 굉장히 중요했다.
어떻게 입증했나.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 조성현 수방사 제1경비단장처럼 용감한 증인들이 있었다. 만약 곽종근 전 사령관이 ‘대통령이 국회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안에 있는 인원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라고 지시했다’가 아니라 ‘그런 지시는 한 적 없고 단지 국회가 혼란스러워서 질서 유지를 위해 들어갔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면, 이 부분을 입증하기 매우 어려웠을 거다. 곽 전 사령관이 용감하게 대통령 앞에서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증언했고, 조성현 단장도 ‘사령관이 내부로 들어가서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정형식 재판관은 곽종근 전 사령관의 ‘진술이 조금씩 달라진다’며 증언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전체적 맥락은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인원인지, 의원인지, 사람인지 이런 부분들은 지엽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재판관으로서는 중요한 사실관계 인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윤석열은 심판정에 직접 출석했다.
출석할 거라고 강하게 예상하지 못했다. 사과하러 나오는 게 아니라면, 부끄러워서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이라면 더 이상 헌법에 가해행위를 해선 안 된다. 그런데 심판정에 떡하니 나타나서 ‘실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등 국민을 계속 선동했다. 어떤 말보다도 그의 제스처가 참 부끄러웠다. 본인한테 불리한 이야기가 증인이나 대리인 입에서 나오면, 그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해보려고 부지런히 움직여 상의하는데, 그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결국 자기가 한 일을 진술하는 것에 불과한데, 그걸 막아보겠다고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 부끄러웠다.
윤석열은 최후진술에서도 사과하지 않았다.
많은 국민이 대통령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 사람이 적극적으로 국민에게 ‘저항하라’고 선동한다면, 국민은 분열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개인적으로 억울한 부분을 떠나 ‘잘못했다, 반성한다’라고 하는 게, 모든 혼란을 만들어낸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신뢰를 받아 선출된 사람으로서 도리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헌법을 수호할 의무를 부여받은 사람이 헌법을 파괴하고 그에 대한 반성도 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분열을 남겨놓고 떠났다.
윤석열 대리인단은 서로 마이크를 빼앗기도 했는데.
(피청구인 대리인단) 최후 변론에서도 차기환 변호사는 자기 얘기를 더 하고 싶어 했고, 조대현 전 헌법재판관은 본인이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마이크를 주지 않으니까 그 옆에 서서 4~5분간 기다리더라. 그 모습을 보면서 계획 없이 또는 자기 욕심에 따라 변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윤석열 측은 오랜 시간을 들여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탄핵심판이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에게 좋은 선전장이 됐다. 아무런 실체도, 증거도 없는 선거 부정을 절실하게 호소했는데, 우리로서는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순간 국민들께서 ‘쟤들이 주장하는 게 말이 되는구나’ ‘논쟁거리가 되는구나’라고 받아들이실까 봐 고민이 많았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멋대로 주장을 펼칠 테고, 적절한 대응 수준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중간에 내가 한 번 이야기했던 것이고(김진한 변호사는 3차 변론에서 “선거 부정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탄핵심판의 쟁점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부정선거 관련 증인신문은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변론 종결 후 38일 만에 선고가 나왔다.
변론이 모두 끝나고, 1~2주가 지나가는데도 결정이 내려지지 않고 알 수 없는 풍문들이 나돌았다. 추측과 예상을 빙자해 어떤 결정을 유도하는 듯한 언론보도도 나왔다.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그것들에 당당하게 대처하고 분명하게 헌법을 수호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많은 시민들이 ‘이게 이렇게 우리 사회를 계속 위태롭게 해야 하는 사건이냐’고 질문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봐도 명백한 사안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오랫동안 고심한 장면들은 공동체의 평가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국민들이 선출한 대표, 민주주의 기관들도 때로는 헌법의 원칙을 위반하고 우리의 자유를 침범할 수 있다. 그래서 그걸(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지켜주는 기관이 필요한데, 헌법재판소는 그런 면에서 권력자나 다른 국가기관을 견제할 정당성을 갖는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이라는 무기를 가졌지만 다른 국가기관과 비교할 때 스스로 가진 힘이 작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와 존중을 받을 때만 그 힘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권력을 통제하기에 적절한 민주적인 기관이 될 수 있다.
이번 선고의 의미를 짚는다면.
우리 민주주의는 굳건하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다. 민주주의자가 필요하다. 많은 시민들이 침묵하지 않고 광장으로 모였고, 그게 헌법재판소의 힘과 결합해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민주공화국은 위태롭다. 한 사람의 비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시스템 전체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회복에 이렇게 많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다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 방어 시스템이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앞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으면서 민주주의를 지켜낼 지혜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