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와인이나 음악을 고르듯 미디어를 소비하는 시대가 됐다. 같은 사건을 두고 여러 신문사와 방송사가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두고 수없이 많은 해석과 연주가 존재하는 것처럼 대통령 탄핵을 다양한 관점에서 다루는 기사와 영상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같은 베토벤 작품을 연주했더라도 좋은 연주와 나쁜 연주가 갈리듯이 대통령 탄핵 관련 기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에게 좋은 연주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좋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게 설득력을 발휘한 뉴스가 다른 사람에게도 항상 같은 정도의 설득력을 갖지는 않는다. 뉴스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또 한편으로 세계가 확장되고 복잡해진 결과인데 이 경우 뉴스조차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20세기 들어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류의 세계관을 확장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항공과 통신 기술에 막대한 자본과 인력이 투입된 결과 세계는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수준으로 서로 긴밀히 연결됐다. 이제 사람들은 라디오를 통해 나라가 해방된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놀랍게도 TV를 통해 인간이 달에 도착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한다. 그런데 아직도 인간이 달에 도착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이 달에 도착하는 장면이 편집을 통해 조작됐다고 여긴다. 인간이 달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한들 사람들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의심하는 사람들을 가짜 뉴스를 유포한다는 죄목으로 처벌하지도 않는다. 달이 아직 우리들의 세계에 생동감 있게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나라 이야기보다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황이 주식이나 빵값에 영향을 주기에, 내가 사는 세계를 더 역동적으로 만든다.
정보 전달의 속도와 다양성은 세계를 더 역동적으로 만든다. 이제 우편 마차를 타고 오는 연애편지는 사랑을 식게 만든다. 신문과 방송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권력자와 유명인을 쉽게 만나 인터뷰하고, 정치인과 지식인, 배우와 가수를 자신의 스튜디오로 불러내는 특권을 이용해 사람들이 알 수 없었던 소식과 정보를 빠르고 생생하게 전달한다. 사람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새로운 정보와 이야기를 동시에 전달하는 미디어의 등장에 열광하고, 이 미디어들이 보여주는 역동적 세계를 쉽게 신뢰한다.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에 인어나 도깨비, 저승사자가 등장해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세상에서 일어날 법한 일로 받아들인다. 언젠가는 조작으로 밝혀질 가짜 뉴스라도 평소 신뢰하는 방송국에서 보도하면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개개인이 만나는 세계가 진실과 사실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변화와 역동성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깨비가 사는 세계는 곧이어 등장할 초능력자가 사는 세계로 쉽게 대체된다.
인터넷과 디지털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신문사나 방송사 같은 레거시 미디어들이 차지하던 기득권과 차별적 지위가 위협받게 됐다. 스마트폰과 다양한 휴대용 단말기가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고 글로벌 미디어 플랫폼 기업들의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되면서 드라마의 다음 에피소드를 보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지상파방송보다는 하루에 드라마 전편을 정주행할 수 있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로 사람들의 관심이 이동했다. 그곳에는 훨씬 더 다양한 세계가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튜브엔 무료로 볼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 취향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1분 내외의 짧고 매력적인 영상을 쉬지 않고 보여주면서 행여나 내 관심을 잠시라도 놓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신문과 방송에선 보도하지 않는 뉴스 이면의 이야기도 개인의 정치 성향에 맞춰 보여준다. 소셜미디어로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동영상을 남보다 빨리 전해주고 반응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신문이 모든 관점을 아우르는 폭넓은 오피니언 면을 매일 아침 독자들에게 배달하는 것이 서비스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지만 오늘날엔 인터넷이 그런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베이조스는 앞으로 ‘워싱턴포스트’는 개인의 자유와 자유시장이란 두 가지 핵심 가치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글을 실을 것이라고 밝혔다. 특정 정치 성향과 취향에 맞춰 신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이란 것이 언뜻 기준이 없고 모호한 개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 취향은 중첩된 비슷한 데이터 사이에서 내게 의미 있는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훈련된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의 희끗희끗한 음영 사이에서 질병의 징후를 읽어내듯, 숙련된 사모님들은 백화점의 명품 매장에서 신상 몇 개를 보고도 세계적 유행의 흐름을 파악한다. 취향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대표 분야가 음악이다. 음악시장에서 개인의 취향이 중요해진 것은 인류 역사 속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서양음악은 음악이 공연되는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자들의 취향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했다. 중세 시대엔 교황과 고위 성직자의 취향이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의 신과 하나의 목소리만 허용됐고, 오르간을 제외한 다른 악기 연주와 다성 음악은 오랫동안 금지됐다. 르네상스 시대가 되자 군주가 지배하는 궁정에서 군주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 위한 기악 음악이 생겨났다. 군주의 취향이 가장 중요했다. 음악이 연주되는 장소와 시간이 한정된 시대에는 음악에 개인의 취향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15세기 중반 독일의 금세공업자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해 인쇄물을 내놨다. 바로크 시대가 되자 악보를 인쇄·유통하는 사업자들이 등장했다. 16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칼뱅주의 신교를 믿는 도시가 된 암스테르담은 종교탄압을 피해 도피해온 인쇄업자들의 피난처가 됐고, 검열 때문에 금서가 된 사상서들을 인쇄해 배포하면서 유럽 인쇄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흥미롭게도 신문보다 악보의 인쇄·유통이 100년 정도 빨리 이뤄졌다. 음표를 달 오선을 미리 인쇄해 놓은 종이 위에 음표를 추가로 인쇄하고, 그 위에 최종적으로 가사를 또 한 번 인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음에도 말이다(오선과 음표, 가사를 한꺼번에 인쇄하는 기술이 곧 개발되긴 했다).
신문보다 악보가 먼저 유통된 것은 신문에 실린 내용에 대한 검열 때문이었다. 오늘날 신문 1면에 실리는 정치, 군사와 관련한 예민한 정보는 손으로 필사한 편지 형태로 우편망을 이용해 믿을 만한 사람들을 통해 구독자에게 전달됐다. 이 편지가 최초로 쓰이는 곳은 로마나 베네치아, 파리, 빈 같은 도시였다. 이 도시들은 음악 작품을 만드는 작곡가들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하나의 악보를 여러 명이 같이 보는 음악의 특성도 대량 인쇄를 선호하는 인쇄업자들이 악보 인쇄를 먼저 시작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악보를 인쇄하면서 발달한 인쇄 기술과 유통망은 나중에 신문의 인쇄, 유통망에 그대로 적용됐다. 하지만 신문은 프랑스혁명으로 언론의 자유가 허용되기 전까지 국가가 허용한 내용만 담을 수 있었다. 신문을 읽는 개인의 취향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바흐의 큰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ilhelm Friedemann Bach· 1710~1784)와 모차르트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프리랜서 음악가였다.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인맥과 천재적 재능에도 조변석개하는 음악 애호가들의 취향 변화에 맞춰 새로운 작품을 내놓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어서 둘 다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했다. 악보에 대한 저작권 개념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 시기에 바흐의 작품을 모차르트와 베토벤에게 소개하고, 합스부르크가의 황제에게 저작권 개념 도입의 필요성을 제안하기도 하면서 고급스러운 음악 취향의 형성에 기여한 인물이 있다.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Gottfried van Swieten·1733~1803)이다. 그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주치의였던 게라르트 판 슈비텐의 아들이었고, 신성로마제국 도서관장이기도 했다.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에 막 도착한 모차르트를 매주 일요일 자신의 주최하는 바흐 음악 연구 모임에 초대해 모차르트에게 바흐의 음악을 소개한 사람이다.
● 1970년생
●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 2023년 제1회 대한민국언론인대상 수상
● ‘당신의 밤과 음악’ ‘노래의 날개위에’ ‘명연주 명음반’ 등 KBS클래식 FM에서 다수의 프로그램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