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m 간격으로 서로를 묶고 만년설을 달리다 [이진기 알프스 콜뒤타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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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귀디미디~발레블랑쉬~르캉산장~콜뒤타퀼~메르글그라스~몽탕베르역~샤모니
수천 년의 세월이 빚은 발레블랑쉬의 빙하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경험은 경외로 바뀐다.
1,000개의 얼음조각 사이로 난 투명한 문을 열었다. 꿈 속에서, 그 환하고 쓸쓸한 길을 좇았다. 이 순간은 판타스마고리아, 현실에 나타나는 꿈같은 일을 말한다. 깊은 겨울, 그 속에서 우리는 시간을 잃고 침묵을 얻었다.

지난 2월 22일부터 2주간 진행된 샤모니밋Chamonix Meet 스키 캠프의 오프피스트 세션에서 올랐던 콜뒤타퀼Col du Tacul(3,413m)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프피스트Off-piste란 정설되지 않은 자연설 스키를 의미한다. 스키 슬로프에서 경험할 수 없는 산악 지형과 도전을 만날 수 있어, 그 매력에 이끌렸다.

빙하에서 길을 찾는 것은 많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
출발 전, 맑은 날씨가 예보되었지만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비즈Bise'도 예고되었다. 비즈는 겨울철 알프스에서 자주 나타나는 차가운 북풍이다. 비즈는 차갑고 성난 바람을 동반하지만, 이날은 맑은 햇살과 함께 밀려왔다. 바람을 피하려 몸을 움츠리자, 배낭이 무겁게 등을 밀어주었다. 매서운 바람은 따스함과 묘하게 섞여 있었다. 비즈는 또한 프랑스식 인사에서 볼 수 있는 표현으로, 양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뜻하기도 한다. 마치 친밀감을 나타내는 의미처럼, 자연도 우리에게 그런 느낌을 전달하는 듯했다. 걱정했던 바람이 잦아들자, 우리는 계획대로 에귀디미디Aiguille du midi(3,842m)로 향할 수 있었다.

에귀디미디에서 시작되는 발레블랑쉬Vallee Blanche는 '하얀 계곡'을 뜻하며, 만년설과 빙하로 가득하다. 날씨가 좋다면 샤모니마을까지 내려올 수 있는, 총 24km에 달하는 스키 코스로 유명하다. 시간은 4~6시간 정도 넉넉히 잡는 것이 좋다. 발레블랑쉬에는 크게 4개의 루트가 있는데, 우리는 그중에서 가장 어려운 '그랑앙베르Grand Envers' 루트를 선택했다. 르캉산장 바로 위로 떨어지는 루트로 우리는 산장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멀리 그랑조라스와 당뒤제앙이 보이고 왼쪽 끝으로는 목적지인 콜뒤타퀼 사면이 보인다.
백컨트리 스키 최적 인원은 3~5명

에귀디미디 설릉을 내려가기 위해선 로프와 크램폰, 그리고 스키를 고정할 수 있는 배낭이 필수다. 이번에 참여한 팀원은 김종규, 한경석, 노재윤, 전수경씨로 1년 전 확정해 준비했다. 8시간의 응급처치 교육과 눈사태, 로프 안전 교육을 모두 이수하고, 오프피스트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모두 뛰어난 다운힐 실력을 가진 분들이었다. 빙하지대에서의 스키는 안전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특별히 장비 준비를 꼼꼼히 했다.

에귀디미디 얼음 동굴에서 발레블랑쉬로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다. 꼼꼼한 장비 준비는 필수다.
설릉을 내려갈 때, 부츠 크램폰을 착용하고 로프로 서로를 묶어 내려갔다. 샤모니 가이드 조합에서 겨울철에 설릉에 철제 난간을 설치해 놓아, 여름보다 더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등반경험이 있는 전수경씨가 앞장섰다. 전수경씨는 한국산악회 회원으로 몇 년전 여름 시즌 샤모니로 등반을 왔던 경험이 있다. 2m 간격으로 안자일렌해서 총 5명이 설릉을 수월하게 내려갔다. 서로를 가깝게 묶는 것이 추락시에 안전하게 제동할 수 있는데, 스키를 메고 있어 2m 간격을 유지했다. 백컨트리스키 의사결정 지원도구인 포켓툴 '니보테스트Nivotest' 를 개발하는 데 사용된 연구에서 3~5명이 백컨트리 스키의 최적 그룹 규모라고 제안한다. 여기서 2명이 적은 이유는 좋은 의견을 수렴하기 어렵고, 5명이 넘으면 위험을 통제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팀원의 최대인원을 5명으로 정했다.

왼쪽부터 샤모니밋 컨덕터 노재윤, 한국산악회 기술위원 전수경, 백컨트리스키 전문가 김종규, 한경석씨
겨울 발레블랑쉬는 살이 올라 도톰했다. 만년설이 두껍고 단단하게 쌓여 있었다. 매년 1월 말까지 크레바스가 눈에 덮여 안전해지기를 기다린다. 우리가 선택한 그랑앙베르 루트는 2월은 되야 안정화된다. 이날의 계획은 에귀디미디에서 발레블랑쉬를 거쳐 르캉산장Refuge du Requin에서 1박을 한 뒤, 콜뒤타퀼로 올라가고, 다시 메르드글라스Mer de Glace로 내려와 몽탕베르역을 통해 샤모니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당일로 가능한 코스였지만, 르캉산장에서 바라보는 제앙빙하의 숨막히는 풍경을 온전히 즐기고자, 여유롭게 1박 2일로 결정했다.

그랑앙베르루트는 계곡 가장 왼쪽에 있다. 계곡 왼쪽으로 갈수록 브래Vraie 발레블랑쉬라고 하는데. 브래란 영어로 리얼Real, 진짜 발레블랑쉬라고 해석할 수 있다.
콜뒤타퀼 설사면에서 스키 하강

에귀디미디 설릉을 내려서 서로 로프를 풀고 스키를 신었다. 후두둑! 햇볕이 소나기처럼 헬멧을 내리쳤다. 머리를 드니 몽블랑 정상이 손에 잡힐 듯하다. 만년설의 주름을 따라 스키로 내려갔다. 설원은 고요했다. 수천 번의 겨울 속에서 단 한 번도 속을 드러낸 적 없는 침묵의 무게였다. 그 위를 지나며 우리는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지, 얼마나 사소한 발자국을 남기는지를 알았다. 눈은 곧 흔적을 지우고, 바람이 그 위에 새로운 선을 그렸다. 계곡의 품은 크고 넉넉했다. 그랑앙베르 루트는 계곡의 가장 왼쪽으로 모든 눈이 그곳으로 모였다.

안자일렌으로 발레블랑쉬 설원을 내려가고 있다. 아래 샤모니 시내까지 보일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경험이 많은 스키어들이라 스키를 A형으로 배낭에 묶지 않고 어께 메기 방식을 선택했다.
고도를 내리자 햇살이 기울었다. 에귀베르트봉 위로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도달한 르캉산장은 해발 2,500m에 위치해 있으며,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오래된 산장이다. 그 이름은 '상어'를 뜻하는 프랑스어 '르캉Requin'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근 얼음과 바위가 상어 지느러미를 닮았기 때문이다.

산장에 도착해 따뜻한 코코아로 몸을 녹였다. 창 밖으로 보이는 제앙빙하는 환상적이었다. 작은 산장이었지만, 아늑하고 특별한 공간이었다.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스키투어링 종료지점인 몽탕베르역. 멀리 드류 서벽이 보이고 젖은 스키를 햇빛에 말리고 있다.
어둠이 빙하를 조각조각 부수고 난 후에야 해가 들었다. 아침 6시 30분, 간단한 아침을 먹고 산장을 나섰다. 오늘의 목표인 콜뒤타퀼로 올라가려면 먼저 산장에서 살라아망제까지 내려가서 스킨을 붙이고 오른쪽 타퀼빙하로 올라가야 한다. 높이 2,800m 지점 패리아드빙하에서 왼쪽으로 향했다. 높이 3,200m에 있는 베르크슈룬트에 스키를 내려 놓고 크램폰을 착용 후 정상까지 올랐다.

우리는 스키로 올라갈 수 있는 3,000m까지 올라간 후 스키로 하강을 시작했다. 콜뒤타퀼 설사면은 서향이라 오후 1시가 되어도 햇볕이 들어오지 않았다. 눈이 녹으면 스키 타기가 어려워지므로 서둘러 하강을 시작했다. 3,000m 알파인 지대에 눈 상태는 좋았다. 파우더가 모인 쪽으로 방향을 잡아 타고 내려갔다. 자연설을 타고 내려가는 기분을 물어 본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압도적인 발레블랑쉬의 전경. 한동안 신설이 내리지 않아 많은 스키 트렉이 보인다. 빙하는 매일 움직이기 때문에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하늘의 맛이 난다. 혀를 톡 쏘는 탄산수 같고 어느 것보다 진실한 맛이다. 전설을 품고 있는 하얀 계곡의 공기는 눈처럼 가볍고 투명했다. 에메랄드빛 빙하를 둘러싼 소중한 세락을 보면 경이로운 감동을 느꼈다. 알프스는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이곳에서 신비로운 것이 경치뿐이랴. 사람도 그렇다. 오른 만큼 정직하게 내려오는 것을 배웠다. 스키 투어링의 묘미는 단순히 스릴을 넘어서,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배우는 데 있다. 이 여정은 속도와 상관없이, 내적 균형을 맞춰가며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자신의 체력과 능력을 바탕으로 설원을 누비는 것이기 때문에 더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이번 콜뒤타퀼 스키 투어는 자연과의 깊은 교감과 동료와의 신뢰 속에서 이루어진 도전이었다. 발레블랑쉬의 고요한 설원을 지나며, 우리는 자연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꼈고, 서로를 의지하며 만들어낸 그 순간들이 얼마나 값지고 특별한지를 깨달았다. 하얀 계곡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한다. 눈 속에 손을 넣어 살며시 쥐었다. 무엇인가 묵묵하고 단단하게 내 안에 쌓였다.

다음날 올라갈 콜뒤타퀼 루트 파인딩을 하는 일행.
등반정보

콜뒤타퀼Col du Tacul

표고차 :1,000m up / 2,900m down

난이도 :GS - A,

소요시간 : 4시간30분 up, 2~3시간 down

장비 : 투어링 스키세트, 안전벨트, 크램폰, 피켈, 아이스스크루, 크레바스 구조장비 케이블카

샤모니 -> 에귀디미디 왕복 90유로며, 성수기 오전시간은 매진되는 경우가 많아 전날 탑승시간을 예약해야 한다. 예약은 매표소와 인터넷으로 가능하다. 르캉산장에서 1박을 한다면 에귀디미디행 편도권만 구매하고 몽탕베르 -> 샤모니 구간 표는 다음날 현장에서 구매하면 된다.

https://www.montblancnaturalresort.com/en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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