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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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간기의 일부 | |||||||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공화파 수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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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공화파: 외국 지원군 |
나치 독일 | ||||||
지휘관 | |||||||
공화파 |
프랑코 세력 | ||||||
병력 | |||||||
보병 450,000명 (1938년) |
보병 600,000명 | ||||||
총 사상자: 500,000여명 |
파시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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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스페인어: Guerra Civil Española, 문화어: 에스파냐 공민 전쟁)은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쿠데타군 사이에 있었던 스페인의 내전이다.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내전이 시작되었고, 1939년 4월 1일에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국민파 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엔 내전으로 인한 여파로 스페인 전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소련과 각국에서 모여든 의용군인 국제여단이 반파시즘 진영이였던 인민전선을 지원하고, 파시스트 진영인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집권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반란군을 지원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초전 양상을 띠었다. 아울러 스페인의 로마 가톨릭교회[주해 1]와 카를로스파를 비롯한 왕당파들은 우파를 지원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항해 공화파에 군수물자를 지원하였으나, 국제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이유로 공화파에 대한 지원에 미온적이었다. 또한, 내전에 대해서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하였지만, 공화파와 지원국 소련 측에는 전투기와 같은 항공기들을, 국민파 측에는 가솔린과 같은 물자들을 팔았다.
배경
[편집]군주제, 공화국 그리고 독재
[편집]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레콘키스타와 로마 가톨릭교회 외의 종교들을 탄압한 스페인 종교재판으로 대표되는 스페인의 중세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왕정과 특권화된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생시켰다.
레콘키스타란, 718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774년에 걸쳐서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반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반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스페인의 전신인 카스티야 왕국와 아라곤 왕국은 당시 무어인을 상대로 770년간 전쟁을 벌였다.[1] 레콘키스타가 완료된 후 스페인 왕국은 스스로를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라 자처하였으며, 교황에게 요청하여 국왕이 종교재판을 관할하는 특혜를 얻었다. 1834년 이사벨 2세가 중지할 때까지 스페인 종교 재판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였다.[2]
스페인 제국은 오랜 전쟁과 종교 재판의 지속으로 봉건 군국주의적인 성격을 띄었다. 중세 후기 1,400만명이었던 스페인의 인구는 18세기 후반에는 700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도 스페인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토지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경제구조가 원인인 빈부의 격차가 극에 달했다.[3] 이에 더해 카스티야 - 아라곤 연합왕국에 반발하는 지역주의가 16세기 이래 계속되고 있었다.[주해 2] 이러한 일들은 결국 왕정 종식의 요구로 이어졌고, 1873년에 스페인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3]
스페인 제1공화국은 분리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제를 표방하였으나,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스페인 내 각지역의 분리 독립 운동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쿠바에서 무장 독립 투쟁이 발생하자 스페인 연방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였다. 분리주의 운동과 더불어 갈등을 겪으면서 군부가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1874년 1월 2일, 마드리드의 군사 총독 파비아 장군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로써 스페인 제1공화국은 군부 독재로 변질되었다.[4]
공산주의 운동
[편집]스페인 제1공화국의 집권 여당이었던 사회당은 바쿠닌에서 비롯한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있었다. 공화국이 해체된 이후에도 스페인의 주요 산업도시에 형성된 노동조합은 아나키즘의 영향아래에 있었다. 한편 1897년 마르크스주의를 강령으로하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이 결성되었다. 이후 러시아 혁명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도 증대하였다.[5]
왕정 복고와 계급 갈등
[편집]스페인 제1공화국의 군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1874년 12월 19일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이 이사벨 2세를 지지하던 각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알폰소 12세를 국왕으로 추대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4] 알폰소 12세는 1876년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를 표방하였다.[6]
왕정복고 이후에도 스페인의 내정은 계급간의 극심한 갈등과 상호 보복이 계속되었다. 극좌파들은 당시 스페인 사회의 주요 기득권층 가운데 하나였던 로마 가톨릭을 타도 대상인 지배계급으로 보아 교회를 파괴하였다. 경찰들은 노동자의 파업 투쟁을 무자비한 진압으로 봉쇄하고 가담자들을 고문하였다. 극좌파의 교회 공격은 점점 거칠어져 1909년 7월 알레한드로 레룩스를 지지하는 노동자 중의 일부가 교회를 불태우고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의 시신을 파내 뒤에서 껴안고 춤을 춤으로써 기독교의 존재와 윤리를 부정하는 사건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에 대한 지배계급들의 보복 역시 가혹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수백명을 체포하였고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처형시켰다.[7]
파업 투쟁
[편집]알폰소 12세의 유복자로 태어난 알폰소 13세는 16세가 된 1902년,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모후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착한 정치가"였으나 스페인 내부의 극심한 갈등을 해결할 능력은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스페인은 중립을 지킴으로서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벌어들인 부의 대부분은 소수의 지배계급에 집중되었다. 이로 인한 갈등은 결국 1917년의 총파업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을 내건 전국노동총연맹과 마르크스주의를 내건 노동자총연맹이 주도한 이 파업투쟁은 결국 군대의 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수백명이 학살되었다.[8]
군부 독재
[편집]1923년 리베라 장군이 극심한 사회 혼란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의 쿠데타는 지주, 교회, 부르조아와 같은 기득권층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리베라는 스스로 총리가 되어 군부 독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1929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에 의해 경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로 인해 리베라는 1930년 스스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9]
제2공화국
[편집]1930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가 사임하자 스페인의 정국은 혼란에 빠진다. 그동안 함께 권력을 누렸던 왕당파와 군부는 반목하고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에서는 군부의 쿠데타가 감지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의 총파업이 예고되었다. 이에 1931년 알폰소 13세는 총선을 약속했으며, 4월 12일 이루어진 총선의 결과 공화파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며 4월 14일에 알폰소 13세는 망명한다.[10]
공화주의자 안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좌파 이외에도 온건 로마 가톨릭교도들과 같은 다양한 집단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스페인에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온건 가톨릭교도이자 부르주아였던 니세토 알칼라사모라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마누엘 아사냐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참여하였다. 제2공화국의 헌법은 지방자치와 평화주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 여성의 참정권 명시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11]
공화국 정부의 가장 큰 현안은 토지 개혁이었으나, 스페인의 소수 지배계급이었던 지주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항으로 개혁은 지지부진하였고, 대공황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어 계급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무정부주의와 파시즘 등의 극단주의가 대두되어 사회는 극도로 불안정하였다. 또한, 아나샤 내각은 지지부진한 토지개혁과 경제 위기로 인해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비난받았으며 1933년에 결국 아사냐 내각은 퇴진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 총선의 결과 이번엔 우파가 집권하였다. 그러나 집권한 우파는 군대를 동원한 노동 운동 탄압으로 인해 급격히 지지율이 하락하였다.[12]
1936년 2월에 치뤄진 총선 결과 스페인 사회노동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473석 중 289석을 확보하였다. 의회를 장악한 인민전선은 토지 개혁을 포함한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이에 대해 스페인의 지주ㆍ자본가ㆍ로마 가톨릭교회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심화되어가는 정치적 혼란 또한 맞물려 마침내 1936년 7월 17일에 스페인령 모로코에 머물고 있던 프랑코와 스페인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13]
쿠데타의 발생
[편집]쿠데타가 갓 발발했을 당시, 이들의 형식상 지휘자는 왕당파였던 호세 산후르호였고 에밀리오 몰라는 부사령관의 자리에 있었다. 여기서 몰라는 1936년 봄부터 쿠데타의 중대한 계획들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7월이 될 때까지도 주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공모자들이 프랑코를 "1936년 미스 카나리아"라 비아냥대기도 했으나, 쿠데타군의 핵심은 프랑코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코는 반란 이전부터 사관학교의 총장이였고, 1934년에 이루어진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성공적인 진압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
1936년 7월 17일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마누엘 고데스 요피스는 각각 카나리아 제도와 발레아레스 제도에 있었다. 이는 쿠데타가 발발할 때가지 제2공화국의 총리였던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가가 군부의 군사행동을 우려하여 내린 조치였다. 이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처지가 된 쿠데타 공모자들은 두 장군들에게 반란의 시작을 알리는 암호를 타전하였다. 이때의 암호는 "스페인 전지역 쾌청함"이었다.[13]
암호를 받은 프랑코는 예인선을 타고 주둔지를 탈영하여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영국의 MI6 소속 정보원이었던 허그 포랄드 소령은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프랑코와 후안 마르크 오르디나가 스페인의 아프리카 주둔군 진영에서 접선하였다고 보고하였다.[14] 이들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공화파 정부의 대응
[편집]공화파 정부는 쿠데타의 징후를 포착하고 있었으나 이를 사전에 차단하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총리였던 키로가의 중대한 오판과 악수로 인해 초동 진압에 실패함으로써 쿠데타군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쿠데타 초기 스페인 전국에서 봉기하는 쿠데타군에 맞서 싸운 것은 공화파 정부를 지지하는 시민들이었다. 마드리드는 쿠데타 초기 마드리드 전투를 통해 많은 시민들의 희생 끝에 쿠데타군에게 몬타나 요새를 점령당하였으나 마드리드를 지킬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아나키스트 민병대가 조직되었으며, 이들은 쿠데타군과 결전을 치뤄 승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병대들은 뒤늦게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진군한 요피스를 체포하여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전이 진행되며 국민파가 카탈루냐 전역을 점령하게 되자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고립되었고 이로 인해 내부마저 혼란을 겪게 되었다.
내전 초, 공화파는 발렌시아와 스페인 동부의 대부분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군이 카스티야 일대와 부르고스와 같은 스페인 북부를 장악하는 가운데, 공화파가 겨우 지켜낸 지역들은 아스투리아스 지방, 칸타브리아 지방과 바스크 지방의 일부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랑코파의 점령지역은 확대되어 갔으며 결국 안달루시아 지방과 수도 세비야까지 함락되었다. 공화파의 이러한 대응에 대해 노엄 촘스키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 |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스페인 공화국은 마비된 상태였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무장하여 쿠데타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공화국 쿠데타만큼이나 무장된 노동자 민병대들에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쿠데타군에게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을 방관하기만 할 뿐이였다. 항구들에는 군함들 또한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 결과 쿠데타군은 스페인 전역을 점령하였고 결과적으로 제2공화국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 ” |
— 노엄 촘스키, 2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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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세력
[편집]공화파는 스페인 내전을 "폭정이냐 민주주의냐"를 놓고 벌인 싸움으로 보았다. 반면 국민파는 자신들의 쿠데타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등 "빨갱이"들로부터 재산권을 보호하고 스페인의 사회 안정을 회복하며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여 무정부상태의 무법천지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 주장하였다.[16]
내전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어느 쪽이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파 측에 가담한 세력으로는 카를로스파들 혹은 알폰소파와 같은 왕당파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 및 보수주의자와 왕정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 같은 세력들이 있었다. 이에 반해 공화파 측에 가담한 세력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바스크와 카탈루냐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국민전선 출신이었던 중도 세력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17]
당시 스페인의 정치는 좌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좌파는 단결하지 못한 채로 나뉘어 있었는데, 스페인의 대표적 좌익 정당이였던 사회노동당은 코민테른에 대표자를 파견하고 있었고 소련은 이를 이용하여 스페인의 내부 정치에 개입하고자 하였다.[18] 그러나 사회노동당은 이러한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 5차 대회 및 7차 대회의 참석을 거부하는 등 소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후 소련의 코민테른 강령에 따른 스페인 공산당이 결성되었다.[19] 이에 반해 우파의 대표적인 정치 세력은 16개 우익 정당의 연합체인 팔랑헤가 1931년 결성되어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스페인의 모든 분야에서 격렬히 대립하였다. 제2공화국 정부의 몇몇 개혁 법률들은 우익을 결집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20]
이외에도 내전 당시 국민파를 지지한 사람들은 가톨릭 성직자, 지주, 기업가, 그리고 쿠데타군에 병력을 제공한 바스크 외곽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 등이었다. 공화파의 지지자들은 대도시의 노동자들, 소작농들을 비롯한 고학력 중산층들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공화국 정부는 자산이 없는 서민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공화파
[편집]공화파는 소련, 멕시코,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 운동가들로 구성된 국제여단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았다. 공화파의 중심 세력은 노동자, 소작농, 도시 시민 등이었으나, 이렇게 공화파는 좌익이 주를 이뤘음에도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아스투리아스와 카탈루냐의 일부 자본가들 역시 공화파를 지원하였다. 정부군 측은 스스로를 "공화파", "인민전선", "충성파", "정부파" 등으로 지칭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켰던 국민파는 이들 모두를 "빨갱이"[21] 라며 일축하였다.
한편, 로마 가톨릭이 강세인 바스크, 카탈루냐와, 급진적 좌파가 우세하였던 갈리시아는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들의 분리 독립 청원은 중앙 정부에 의해 기각되었다. 내전 도중에는 이러한 모든 세력들이 연합하여 "인민공화군"(스페인어: Ejército Popular Republicano)을 구성하고 있었다.[22]
국민파
[편집]제2공화국 정부에 의해 "반란군", "역적", "파시스트" 등으로 불린 국민파 세력은 권력의 중앙집중과 반공주의를 공통 분모로 하는 여러 세력의 연합이었다. 이들은 왕당파, 지주, 유산가, 보수주의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여러 운동 세력에 의해 스페인이 분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단순히 반공을 외치는 것 말고도 정부의 반교권주의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국민파를 지지하였다. 당시 스페인 내에서는 급진적인 공화파에 의해 교회 파괴와 반 기독교 운동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교회 공격에서 종종 성직자가 살해되는 일도 벌어졌으며, 이에 대해 국민파는 공화파의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만행이 극에 달해 전쟁 전에 이미 7,000여 명 이상의 성직자가 학살당하였다고 주장하였다.[23]
쿠데타군은 내전 초부터 프랑코가 전권을 쥐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도자를 맡았던 호세 산후르호가 리스본 인근에서 비행기 사고로 죽고, 부사령관으로서 프랑코와 비슷한 세력을 구축했던 에밀리오 몰라는 1937년 6월에 사고사함과 동시에 국민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팔랑헤당의 당수 프리모 데 리베라의 내전 전부터 알리칸테 감옥에 투옥된 것까지 겹쳐 프랑코에 대한 권력의 집중이 진행되어 팔랑헤당을 비롯한 다른 정당을 통합, 개편한 통합 팔랑헤에서 당수로 프랑코가 취임하거나 이후 다른 정당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등 굳건한 군사독재 체제를 굳혔다.
기타 세력
[편집]카탈루냐 민족주의와 바스크 민족주의 세력들은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하기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반스페인적 민족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제2공화국 공화파 정부를 지지하였는데, 이는 이들이 국민파 측이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반교권주의적인 성향도 지니고 있었으며, 카탈루냐 지역에서 일어난 성직자 살해와 같은 일들은 상당수가 이들의 소행이었다.[출처 필요]
국제 사회의 개입
[편집]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유럽의 각국은 스페인 내전이 또다른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국제 연맹을 통하여 각 국의 군사 개입을 금지하는 불간섭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공화파와 프랑코파 양측 모두 세계 각 국의 지원을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으나 공화파에게 각종 물자를 조달하였다. 프랑코파 측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24]
프랑코파에 대한 지원
[편집]아일랜드 정부는 스페인 내전에 대해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인들은 각자의 정치 신념에 따라 양측 모두에 참전하였다. 아일랜드의 청년 250명이 공화파를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는 동안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에오인 오더피가 이끄는 "푸른셔츠 단" 700명은 프랑코파 측을 위하여 참전하였다. 이미 에스타두 노부 체제의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던 포르투갈에서는 비리아토스라 불린 8,000명의 자원병이 프랑코의 휘하로 들어갔다. 포르투갈은 많은 군수품을 프랑코 측에 지원하였다.[25] 루마니아의 극우주의 세력이었던 철위대 역시 자원병을 프랑코 측에 제공하였다.[26]
프랑코파 반란군에게 가장 큰 지원을 한 곳은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 파쇼 치하의 이탈리아였다.
독일과 이탈리아
[편집]반란을 일으킨 프랑코는 히틀러 무솔리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세 차례의 주요 작전을 수행하였다. 첫 작전 "불의 마법"은 1936년 1월 말에 진행되었으며 프랑코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52척의 군함과 20여기의 수송기 및 6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였다. 같은 해 9월 두 번째 작전 "오토"를 통해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24대 이상의 1호 전차를 제공하였다. 10월에는 세 번째 작전을 통해 600~800명의 독일군이 직접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였다. 히틀러의 가장 큰 지원은 콘도르 군단을 스페인 내전에 투입한 것이었다. 나치 자원병으로 구성된 콘도르 사단은 1936년 3,500여 명이 참전한 이래 내전 기간 동안 19,000여 명이 투입되었다.[27]
무솔리니는 스페인 내전의 공을 히틀러가 독차지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히틀러 보다 많은 군사를 스페인 내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무솔리니는 내전 기간 동안 50,000명 이상의 군대를 스페인 내전에 참전시켰다.[28]
공화파에 대한 지원
[편집]국제 여단
[편집]유럽 전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스페인의 '민주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의용병이 모여들었다. 아나키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극좌파, 자유주의를 아우르는 다양한 이념을 가진 이들은 국제 여단이라 불렸으며 스페인 내전을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한 최전방으로 여겼다. 53개 국가에서 모인 약 30,000명의 국제 여단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헌신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파시스트 군대를 저지하는 업적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미국인 의용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으로 캐나다 의용군은 메켄지-파피뉴 여단으로 불렸다. 국제 여단의 상당수는 코민테른에 의해 모집되어 루마니아 공산당에서는 5백명의 공산당원이 참전하였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의 조카 에스먼드 로밀리와 같은 자유주의자들 역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 여단에 합류하였다. 당시 국제 여단의 자원병으로 참여한 사람 중에는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같은 지식인도 상당수 있었다.[29]
영국과 프랑스가 불간섭 조약을 체결하여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 여단의 참전은 공화파에게 사실상 유일한 병력 지원이었다.[30]
소련
[편집]소련은 스페인 공화국 정부에게 군사물자를 지원하였다. 내전 기간 동안 지원된 군수 물자는 비행기 806기, 전차 362대, 야포 1,555문 등이었다.[31] 또한 소련은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무시하고 소수의 군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히틀러와 비밀리에 불가침 조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직접적인 지원은 제한적이었다.[32] 대신에 군자금으로 상당한 양의 금을 스페인 은행으로 보냈다. 이때 보내진 510 톤의 금은 모스크바 황금으로 알려져 있다.[33]
소련은 약 700명의 군인을 파견하였다. 독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의용군"이라 불린 이들은 전차와 전투기를 운용하였다. 이들의 참전은 "X 작전"이라 불렸다.[34]
멕시코
[편집]당시 멕시코 내부의 여론은 다수가 프랑코파의 승리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와 달리 멕시코는 공식적으로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실제 지원 규모는 2백만 달러 규모에 불과하였다. 멕시코는 멕시코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벨랑카 CH-300 등의 전투기를 지원하였다.
경과
[편집]내란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파 반란군의 우세로 진행되었다. 1937년 바스크 북부지방과 아스투리아스 지방이 반란군에 점령되었고, 1938년 12월 카탈루냐 지방이 반란군의 공격을 받아 1939년 3월 5일 공화파 정부는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3월 7일에는 마드리드에서 공화파 내의 비 공산당 세력이 공산당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또다른 내란이 발생하였고 3월 28일 반란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35]
1936년
[편집]내전 발발 직후인 7월 20일 반란군의 사령관이었던 산후르호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다. 이로 인해 반란군 측의 지휘 체계는 양분되어 북방에서는 에밀리오 몰라가, 남방에서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13] 반란 5일째인 7월 21일 반란군은 스페인 해군의 기항 페롤을 점령한다. 몰라 휘하에 있던 베오르레기 카네 대령은 7월에서부터 9월까지 스페인 북부의 기푸스코아 주를 점령해 나갔다. 키푸스코아에는 파시스트에 맞선 공화국 군대가 고립되어 있었다. 9월 5일 격렬한 전투 끝에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공화파 군대가 지키던 이룬이 반란군측에 점령당하였다. 9월 13일에는 바스크 지방의 주도 빌바오의 관문인 산 세바스티안이 반란군에게 항복하였다. 공화국 정부군은 9월 말까지 비즈카야에서 저항하였다.
9월 21일 살라망카에서 회합을 가진 반란군은 프랑코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13] 9월 27일 톨레도에서 벌어진 알사자르 공방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자 반란군은 전황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0월이 되자 프랑코의 반란군은 마드리드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1월 6일 공화국 정부는 전투를 피해 발렌시아로 옮겨졌고 주요한 전투는 11월 8일에 시작되었다. 프랑코의 반란군은 11월 27일까지 3,000여 명의 국제 여단이 지키고 있는 마드리드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으나 함락에 실패하였다. 프랑코는 전략을 바꿔 마드리드를 포위하여 고립시키고 전폭기를 동원하여 폭격하였다. 마드리드는 그 후로도 2년 동안 고립된 채 반란군과 싸웠다.
1937년
[편집]1937년 1월과 2월에 걸쳐 프랑코는 마드리드를 함락하고자 공격하였으나 또 다시 실패하였다. 2월 8일 말라가가 프랑코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2월 21일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파시스트 측의 외국 병력 참전은 불법 교전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러나 3월 7일 나치 독일은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콘도르 군단을 파병하면서 하인켈 He 51 전폭기를 스페인에 투입하였다. 4월 26일 독일의 전폭기는 게르니카를 폭격하여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이틀 뒤 프랑코는 게르니카를 함락하였다.
게르니카 함락 이후 공화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프랑코가 마드리드 함락을 위해 전력을 쏟아붇는 사이 공화군은 세고비아를 탈환할 수 있었다. 6월부터 벌어진 빌바오 전투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7월 3일 공화군은 반란군의 부사령관이었던 에밀리오 몰라를 사살하였다. 공화군은 전력을 다해 마드리드를 포위하고 있던 프랑코군에 대적하기로 결심하였다. 두 군대는 마드리드 근교에서 벌어진 브루네테 전투에서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다. 이 전투의 결과 공화군은 마드리드 포위를 분쇄할 수 있었다.
8월이 되자 프랑코는 아라곤 지방을 공격하였으며 산탄데르를 점령하였다. 이후 두 달간 벌어진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전투에서 바스크 지방의 공화군은 끝내 항복하였다. 이후 프랑코의 군대는 스페인 북부지역을 점령해 나갔으며 11월에는 발렌시아로 진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결국 공화파 정부는 바르셀로나로 옮겨졌다.
1938년
[편집]반란군의 군대가 테루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내전의 상황은 반란군 측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테루엘은 오랫동안 반란군이 강세를 보이던 곳이었다. 1938년 1월, 공화군은 테루엘을 점령하였다.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군의 지원을 받아 테루엘을 공격하였다. 2월 22일엔 피아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 끝에 테루엘은 다시 반란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36]
3월 7일 프랑코 측은 아라곤 공격을 감행하였다. 4월 17일 프랑코파의 군대가 지중해 연안까지 진격함으로써 정부 진영은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5월이 되자 정부는 강화 조약을 요청하였다.[37] 그러나 프랑코가 정부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었고 프랑코군은 발렌시아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7월까지 계속된 공방의 결과 공화군은 자신들의 XYZ 방어선을 사수할 수 있었다.
공화국 정부는 에브로 전투가 진행 중이던 7월 24일부터 11월 26일까지 대대적인 지원 호소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 호소는 실패하였는데, 이미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히틀러의 야심을 포기하게 하는 대가로 프랑코와 뮌헨 협정을 준비하고 있었다.[38] 서방 세계의 연합에 의한 반파시스트 전선이라는 정부의 희망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아프리카 군단이 주축이된 4만명의 프랑코파 군대를 상대로 공화군은 에브로 전투에서 분투하였으나 이미 병력과 무기에서 절대적으로 수세에 몰려있던 공화군은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신년을 이틀 앞둔 세밑에 프랑코는 군대를 카탈루냐 지방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편집]반란군은 신년이 시작된 두 달 동안 바람과 같이 카탈루냐 지방을 점령해 나갔다. 2월 27일엔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코 체제를 인정하였다. 마드리드를 비롯한 몇몇 지역만이 공화군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인민전선파 내부에서도 철저한 항전을 목표로 한 스페인 공산당과 전의(戰意)를 상실한 아나키스트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다. 3월 28일 마드리드가 점령되었고 그 다음날에는 발렌시아 역시 점령되었다. 4월 1일 프랑코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스페인 공화국 정부가 항복하였음을 선언하였다.[39]
전쟁이 끝나고 프랑코가 집권하자 잔혹한 보복이 뒤따랐다.[40] 수천명의 공화군이 투옥되었고 최소 30,000명이 처형되었다.[41] 이 때의 희생자 수가 50,000명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다.[42]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노역을 해야만 하였다.
전쟁 후 공화파의 상당수가 망명하였다. 프랑스로 피신한 사람의 수는 50만 명에 달한다.[43] 1944년 프랑코에 대항하는 게릴라인 스페인 마퀴스가 결성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와 연대하여 나치에 맞섰다. 스페인 마퀴스는 1950년대까지 활약하였다.
결과
[편집]제2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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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는 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또한 내전 후에도 승리한 반란군 측은 반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및 보복을 시작했다. 심지어는 영아를 조직적으로 유괴해 인신 매매까지 자행하였다.[44]
스페인의 총통이 된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일인독재정치를 계속하였다. 또한 프랑코의 사후(死後)에 부르봉 왕조가 복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프랑코 정권
[편집]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추축국과의 지나친 동맹을 우려한 미국에 의해 무역이 봉쇄되어 자급자족적 경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마셜 플랜에 따른 지원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농촌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였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또다시 25만명 이상의 대규모 이민이 있었다.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프랑스로 향하였다. 이로 인하여 스페인 출신 프랑스인은 오늘날에도 외국 출신 프랑스인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45]
1955년부터 스페인은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 유엔에도 가입하였다.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 스페인은 높은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인민전선파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고, 아울러 공화파를 지원했던 바스크어와 카탈루냐어는 공공장소에서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인민전선파의 스페인 망명 정부는 멕시코에서 1976년까지 존속했다.
관련 작품
[편집]스페인 내전은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는데,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등은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내전에 직접 참전한 사람들의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도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영화이다.
같이 보기
[편집]- 스페인의 역사
- 프란시스코 프랑코
- 동물농장
- 백색테러 (스페인)
- 적색테러 (스페인)
- 《랜드 앤 프리덤》
- 《판의 미로》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카탈루냐 찬가》
- 《게르니카》
-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프란시스코 사바테 요파르트
- 철의 칼럼
- 콘도르 군단
- 프랑코 정권
- 전쟁 영화 목록
- 로버트 카파
- For Whom the Bell Tolls (메탈리카의 노래)
각주
[편집]내용주
[편집]- ↑ 1930년대 당시 스페인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전 영토의 3분의 1을 소유한 기득권층이었다.
- ↑ 특히 바스크 지방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거셌다. - 강석영, 《현대 스페인》,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7년, ISBN 89-7464-448-7, 제10장 바스크 분리주의 운동
참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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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혁, 《스페인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ISBN 89-8435-147-4, 91-101쪽
- ↑ 가 나 엔터니 비버(2006), 7 ~ 30쪽
- ↑ 가 나 강석영, 현대스페인,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8, 서울, ISBN 89-7464-448-7, 13-14쪽
- ↑ 엔터니 비버(2006), 40-43쪽
- ↑ 조지 오웰, 정영목 역,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1년, ISBN 9070020240 {{isbn}}의 변수 오류: 유효하지 않은 ISBN., 300쪽
- ↑ 엔터니 비버(2006), 45-46쪽
- ↑ 이강혁(2006),288-290쪽
- ↑ 이강혁(2006),291-292쪽
- ↑ 강석영, 현대스페인,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8, 서울
- ↑ 이강혁(2006), 293-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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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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